창의성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쓸 수 있습니다. 창의성이란 새로운 것, 그림이나 조각, 심포니, 시, 소설 등 보거나 들을 수 있는 어떤 것이 만들어진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탄생시키는 자세로 창의성을 이해하기도 합니다. 사물의 세상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는 자세 말입니다.
창의성
창의성이란 무엇일까요? 창의성은 보고 대답하는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무엇도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않고 그 무엇에도 진정으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보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 과정에서 창의적인 자세와 그렇지 않은 자세는 무엇이 다른지부터 살펴봅시다. 어떤 사람이 장미를 보고 '이것은 장미다' 혹은 '나는 장미를 본다'며 단정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는 실제로 장미를 볼까요? 실제로 장미를 보는 사람도 많겠지만 대부분은 그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경험을 하는 걸까요? 그들은 하나의 대상을 보면서 자신이 본 대상이 '장미'라는 개념에 해당하며, 이런 이유에서 '나는 장미를 본다'는 단정이 옳다고 확신합니다. 여기서 보는 행위는 실질적 행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지성적 행위입니다. 보통 우리가 사람을 볼 때 겪는 일도 사물을 볼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특정한 사람을 본다고 믿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우선 부수적인 것만 봅니다. 그의 피부색, 옷 입는 방식, 사회적 지위, 교육, 다정한지 여부,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 여부만 봅니다. 우리가 맨 먼저 알고 싶은 것은 그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이름을 듣고 그를 분류합니다. "이것은 장미다"하고 말하면서 한 송이 꽃을 분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그를 인지하는 방식은 그가 자기 자신을 인지하는 방식과 너무나 똑같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인 사람에게서 추상을 봅니다. 그 사람 역시 자기 자신과 우리에게서 추상을 봅니다. 그 이상은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겐 보편적 공포가 있습니다. 상대에게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갈까 봐, 표면을 뚫고 그의 핵심으로 밀고 들어갈까 봐 겁냅니다. 차라리 덜 보고 말지 더 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와 함께하는 순간의 계획에 꼭 필요한 이상은 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겉핥기식 만남은 타인에게 무관심한 우리의 내면 상태와 일치합니다. 다른 사람을 창의적으로 본다는 것은 투영과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본다는 뜻이며, 이는 어쩔 수 없이 투영과 왜곡을 낳는 자기 내부의 신경증적 '악덕'을 극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완전히 눈을 떠 내면과 바깥의 현실을 인지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내면의 성숙에 이른 사람만이, 자신의 투영과 왜곡을 최소로 줄일 수 있는 사람만이 창의적으로 살 것입니다.
감탄하는 능력과 집중력
보고 응답하고 인식하고 인식 대상을 알아보는 감각을 갖추는 이런 창의적 자세의 전제 조건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조건은 감탄하는 능력입니다. 아이들에겐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새로운 세상에서 갈 길을 찾고 항상 새로운 사물을 붙잡아 알아가려는 노력을 다합니다. 또 아이들은 당황하고 놀라며 감탄할 수 있고, 바로 이를 통해 창조적으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육과정을 거치고 나면 대부분은 감탄하는 능력을 잃습니다. 이제 자신은 사실상 모르는 것이 없으며, 감탄은 배우지 못한 증거라 생각합니다. 세상은 더 이상 기적으로 가득하지 않고 사람들은 세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감탄하는 능력이야말로 예술과 학문에서 독창적 결과가 나올 수 있게 하는 조건입니다. 창조적 자세의 두 번째 조건은 집중력입니다. 우리는 늘 분주하지만 집중하지 못합니다. 어떤 일을 하면서 이미 다음 일을, 지금 하는 일을 끝마칠 수 있는 순간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최대한 많은 일을 동시에 합니다. 다섯 가지 일을 동시에 하지만 그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 일이 자기 힘의 표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진정으로 집중할 땐 지금 이 순간에 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나 미래에 삽니다. 하지만 실제 경험으로서의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만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식과 응답 역시 지금 여기에만 존재합니다. 지금 이 순간 하고 보고 느끼는 것에 전념한다면 말입니다. 자기를 경험하는 능력은 창의적 자세의 또 한 가지 조건입니다. 자신의 자아,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자기 행동의 진짜 주인으로 경험합니다. 그것이 바로 독창성입니다. 새로운 발견이 아닌 나 자신에게 기원을 두는 경험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한 감정, 즉 자기 정체감이 필요합니다. 이 '자기'감정과 관련된 오해가 매우 많습니다. 심리학자 중에는 이 감정을 자신에게 할당된 사회적 역할의 반영일 뿐이라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타인이 나에게 거는 기대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이 경험하는 자기의 방식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짙은 불안과 공포, 강박적인 동조 욕망을 초래하는 병리학적 현상입니다. 공포와 동조의 강박은 나 자신을 내 행동의 주인으로서 창의적으로 경험하는 '자기'감정을 키워야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결코 자기중심적이거나 자기도취적으로 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정반대로 타인과 관계 맺음의 과정에서만, 혹은 창의적 자세를 토대로 삼아야만 나를 '나'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타인과 아무 관계도 맺지 않고 고립될 경우 자기 정체감과 자기감정을 전혀 키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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