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인생의 최악이 아니다. 최악은 무관심이다. 고통스러울 때는 그 원인을 없애려 노력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 감정도 없을 때는 마비된다. 지금껏 인류 역사에서 고통은 변화의 산파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무관심이 운명을 바꾸는 인간의 능력을 짓밟아버릴 것인가?_에리히 프롬
기술과 신체 건강
실제 삶에 대한 무관심 중 대부분은 삶에 대한 은폐된 적개심이며 삶과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이 무력해졌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사물을 측정하고 계산하고 조종하기 위해 특정 기술을 개발할 가능성은 인류 역사가 이어져 오는 동안 엄청난 축복임이 입증되었습니다. 따라서 기술과 기술적인 것에 대한 사랑 역시 당연히 존재합니다. 디지털 혁명과 더불어 컴퓨터의 가능성은 무한히 확장되었고, 디지털화와 전자 미디어, 네트워크 기술의 가능성은 어마어마한 매력을 발산합니다. 기술이 낳은 이런 작품에 끌리는 마음도 네크로필리아일까요? 기술에 대한 열광은 우리가 살아 있는 것보다 죽은 것을 더 매력적으로 생각한다는 증거일까요? 이는 확실하게 '예', '아니요'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우선 기술이 더 많이 발달한 분야에서 인간은 자력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낸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특히 전자 미디어는 만능 재주꾼임이 밝혀졌고 생명력이 넘쳐나는 듯 보입니다. 검색엔진을 이용하면 언제라도 인류의 지식을 취할 수 있는 데다 순식간에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 연결되며 인생의 거의 모든 문제에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전자 미디어는 우리가 삶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막강한 도우미입니다. 하지만 기술이 유용하다 보니 인간은 자력을 키우는 훈련에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신체의 힘이 약해진 건 이미 오래전에 깨달은 사실입니다. 차를 타고 다니면서 스스로 움직이지 않을수록 근육은 자꾸만 위축될 것입니다. 따라서 신체 건강을 유지하지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기술과 신체 건강, 그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 택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자기감정
기억력, 집중력, 상상력, 심사숙고 같은 정신적인 힘 역시 잃지 않으려면 훈련해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스스로 노력하거나 '깨어 있지' 않고 남들이 상상하거나 생각한 것 혹은 '딴생각'이나 딴짓하게 만드는 것에 혹하는 마음이 너무 큽니다. 자기감정의 능력에 이르면 자기 것을 홀대하지 말아야 할 필요성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오늘날엔 산업 전체가 사람들에게 속삭입니다. 자기감정을 느끼기보다 체험과 감정 서비스에 공감하는 편이 훨씬 더 매력적이라고, 자기감정은 불확실하고 심지어 부정적일 때도 많다고 말입니다. 자극으로 일깨운 연출된 감정에만 공감하는 사람은 누군가가 보고 싶고 누군가와 같은 마음이 되며, 누군가를 그리고 믿을 수 있으며, 마음으로 슬프고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자신의 정서적 능력을 잃고 맙니다. 자신의 삶과 생명력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감정입니다. 느끼지 못하면 그것은 '사라진다.' 그와 동시에 자극과 스릴, 열광에 대한 욕망이 점점 더 커지고, 더불어 체험과 생기를 억지로 밀어 넣는 미디어에 더욱 종속될 것입니다. 몸의 능력에 해당하는 내용은 인지 및 정서 능력에도 똑같이 해당하기에, 기술의 성과는 기술과 인지 및 정서 능력,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하되 다른 하나도 방치하지 않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삶과 공생의 복잡한 문제에서도 알고리즘과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의존하는 것이 매우 매력적인 듯 보이지만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심리적 자력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삶에 대한 사랑이 무력감을 이기려면
인간이 기술과 두루두루 공생하고 컴퓨터 프로그램 없이는 일상을 살아갈 수 없다고 해도 생명과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은 바이오필한 신체적, 정신적 자력의 활성화에 좌우될 것입니다. 프롬이 <활동적인 삶>에서 말했듯 그런 활동성은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고, 강요된 것이 아니며, 우리 모두에게 깃든 창조적 힘에서 나오는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 탄생한다"는 의미입니다. 프롬에 다르면 살아 있는 것은 인간 자체에, 그의 특징인 신체적, 심리적, 정신적 자력에 깃들어 있습니다. 삶에 대한 사랑은 "종류를 불문하고 모든 사랑의 핵심"입니다. 이기심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바이오필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지성과 감정, 관능의 특징을 모두 갖춘 인성 전체를 펼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일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사회 발전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 심리적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에 무력감을 느낍니다. 인간을 종속시키고 무력하게 만드는 원인이 외부의 거대한 힘 때문이 아니라면 무력감을 일으키는 이유는 대부분 우리 내면이 무력해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이 무력해졌기 때문입니다. 삶에 대한 사랑이 무력감을 이기고 다시 깨어나려면 바이오필한 자력이 되살아나야 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감정을 빠짐없이 느끼며 창조적으로 활동하는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삶에 대한 최소한의 사랑이 없다면 어떤 인간과 문화도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삶은 또한 항상 과정입니다. 변화와 발전의 과정이며, 기존 구조와 태어난 환경이 주고받는 끝없는 상호작용 과정이기도 합니다. 사과나무는 절대 벚나무가 될 수 없지만, 사과나무나 벚나무는 타고난 체질과 환경 조건에 따라 멋진 나무가 될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떤 나무에는 축복인 습기와 햇볕이 다른 나무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도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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