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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상담/심리학

삼십대 중반부터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_융 심리학

by 달팽이상점 2022. 7. 19.

살지 못한 삶

중년에 이르면 분리된 시각에서부터 갈망이 생긴다. 우리는 각자의 잃어버린 쌍둥이, 즉 의식 아래 어딘가에 묻힌 '살지 못한 삶'과 만날 준비를 한다. 예민한 사람은 중년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삶이 무미건조해지고 있음을 감지한다. 통찰력이 있다면, 인격에는 한 가지 층위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언젠가는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예컨대 한 사람의 인격에 현실적이고 본능적이며 실용적인 측면과 숭고하고 이상주의적인 측면이 모두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어쩐지 근본적인 뭔가로부터 갈라져 나온 듯한 기분을 느낀다. 인격의 한 면은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 세상과의 융화에 매달리는 반면 또 다른 면은 황홀경과 초월성, 영적 귀의를 갈망하는 것이다. 서른다섯에서 쉰 살까지는 심리적으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다. 나이가 들면서 사라졌던 어릴 적 특성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늘 소중히 여겨온 신념, 도덕관념, 삶의 원칙들이 갑자기 미심쩍어진다. 노화의 문턱이 가까워지는 시점이면 이제껏 내면에 쌓아온 그림자가 너무 비대해져서 우리는 풀지 못한 욕구와 미련에 압도당하고 만다. 이런 변화에 대해 융은 이렇게 썼다. 중년에 가까워질수록, 그리고 개인적 태도와 사회적 지위를 견고히 다져온 사람일수록, 자신이 올바른 길과 올바른 이상, 올바른 행위 원칙을 발견했다는 믿음이 강해진다. 그런 까닭에 그것들이 영원히 유효하리라고 생각하고 그것들에 변함없이 집착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사회적 성공은 '인격의 축소'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한다. 경험되었어야 하는 삶의 많은 면, 너무나 많은 면면이 창고의 먼지 쌓인 기억들 틈에 박혀 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의도한 결과를 끌어내는 능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위기감에 직면한다. 아마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는 탓이리라. 전과는 달리 머리가 시키는 족족 몸이 재깍 따라주지 않고, 부모의 죽음, 심지어 친구의 죽음을 경험하기도 하며, 젊은 날의 꿈은 허황하게만 느껴진다. 이 모든 일로 인해 중년은 '출생 이후의 시간'에서 '죽음을 앞둔 시간'으로 정신적 이동을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자기 삶에는 여전히 뭔가 근본적인 것이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지상에서 맡은 책임이 있는 한 우리는 시간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예를 들어, 결혼을 하면 자기 삶의 일부는 통째로 치워버리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 일터로 가야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새벽 4시에도 수유해야 하며, 아이를 학교, 병원, 운동 연습, 놀이 약속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일에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그러나 중년이 되면 이 시간의 감옥에서 탈출하고픈 생각이 들기 시작하고, 주된 문제는 전부 자유시간이 부족한 탓으로 귀결된다.

 

변화의 기회

개발되지 않은 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의 대부분은, 심리학적으로 말해 부담스러울 정도로 좋아서 그런 것이다. 무슨 헛소리냐 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삶을 솔직히 들여다보면 그게 진실임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가장 고귀한 특성을 인정하지 않고 대신에 그것을 대체할 허깨비를 찾아낸다. 예를 들어, 영혼이 담긴 삶 대신 술병에 담긴 영혼에 만족한다. 신이 내리는 황홀경 대신 뭔가를 소비하거나 누군가를 소유하는 데서 오는 일시적인 고양감에 취한다. 언뜻, 자신의 최고 잠재력을 왜 다른 물건이나 사람에서 찾는지 의아해지기도 한다. 자아의 입장에서 볼 때, 숭고한 특성이 드러나면 인격 구조가 통째로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자기 존재의 신성이 드러나는 일만큼은 막으려 아마 신경증적인 힘을 발휘해 그 힘이 다할 때까지 싸울 것이다. 고무적인 사실을 귀띔하자면, 중년기의 내면 작업은 구제 불능의 어두움만이 아니라 최상의 가치를 끌어내기도 한다. 하데스에는 그저 상실과 비탄, 암울함만 있는 게 아니다. 그곳은 풍요로 가득한 변화의 땅,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수확하는 약속의 땅이다.

 

품위 있게 무의식으로

중년기에는 융이 절묘하게 표현했듯 "품위 있게 무의식으로 가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언제나 의식의 긴장과 부담에 매여 살아가는 현실에서 대안을 찾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품위 있게 무의식으로 간다는 것은 내면으로 쏟아지는 온갖 정보의 잡음을 의도적으로 멎게 함을 의미한다. 단, 과도하고 무감각하게 일하거나 먹거나 취하거나 소비하거나 섹스에 몰두하거나 텔레비전에 빠지는 등 강박적이고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의식을 몰아내려 해서는 안 된다. 주의력을 발휘하면 습관과 패턴에서 벗어나 더 위대하고 완전한 무엇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여기엔 일종의 연습이 필요하다. 현대인의 삶은 행함과 존재함이 완전히 분리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반성과 사색, 현존에 집중하는 시간을 따로 내는 수밖에 없다. 분별없이 백일몽을 꾸거나 그냥 멍하니 있거나 정신을 놓는 것과는 다르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지고한 잠재력을 깨닫는 능력은 활기차게 존재하는 상태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존재함'을 삶으로 초대할 수 있다. 존재함이 일어날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 삶의 속도를 늦추기는 어려워도, 우리에겐 삶의 긴장과 모순을 한데 모아 합칠 조용한 장소가 필요하다. 계속 행하기만 하면 안 그대로 복잡한 문제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 꼴이다. 살기에 바쁜 나머지 우리는 삶을 경험하는 방식에 의문을 가질 틈조차 없고, 그래서 언제든 감지하거나 느끼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의 대부분을 무시해버린다.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는 것들이다. 의식을 확장하려면 반드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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